핫이슈 | 장이 아팠던 걸 뇌가 기억한다? 면역세포가 장에서 뇌까지 이동

장 감염을 경험한 면역세포가 장에서 뇌를 둘러싼 수막으로 이동해 병원체에 대한 면역기억을 유지하는 현상을 표현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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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염이나 식중독을 한 번 앓고 나면 우리 몸의 면역계는 그 병원체를 어느 정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최근 흥미로운 연구가 나왔습니다.

장 감염을 겪은 생쥐의 CD4+ T세포가 장을 떠나 뇌를 둘러싼 수막과 일부 뇌 조직까지 이동한 뒤, 이전에 만났던 병원체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연구진은 같은 병원체가 다시 혈액으로 들어왔을 때 이 면역세포들이 빠르게 반응하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연구 결과는 9월 8일 국제학술지 Nature Neuroscience에 발표됐고, Nature는 15일 이 연구를 주요 과학뉴스로 소개했습니다.

제목만 보면 “장이 아팠던 일을 뇌가 기억한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기억은 우리가 과거를 떠올리는 뇌의 기억과는 다릅니다.

정확히는 면역세포가 이전에 만난 병원체를 기억하는 ‘면역기억’입니다.

장 감염을 겪은 면역세포가 왜 뇌까지 갔을까

우리 뇌와 척수는 세 겹의 막인 수막(meninges)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바깥쪽이 경막(dura mater)입니다.

경막에는 혈관과 다양한 면역세포가 모여 있습니다. 특히 경막의 정맥동 주변은 혈액 속 병원체가 중추신경계에 접근할 수 있는 경계지역이기 때문에 면역 방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연구진은 여기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장에 들어왔던 병원체를 기억하는 면역세포가 뇌 주변까지 이동해 다음 감염에 대비하는 것은 아닐까?”

실험 결과 실제로 그런 현상이 관찰됐습니다.

장에 있던 CD4+ T세포 일부가 감염 이후 경막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장기간 머물며 이전 병원체를 기억하는 기억 T세포로 자리 잡았습니다.

어떤 감염을 실험했을까

연구진은 생쥐에게 여러 종류의 장 감염과 염증을 일으켰습니다.

살모넬라 같은 세포 내 세균, 장 감염을 일으키는 세포 외 세균, 장내 기생충, 그리고 염증성 장질환을 모방한 대장염 모델 등을 사용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병원체 종류에 따라 장에서 만들어진 T세포의 특성이 달라졌고, 경막에 도착한 T세포 역시 그 특성을 그대로 반영했다는 것입니다.

즉 장에서 어떤 감염을 경험했는지가 뇌 주변의 면역환경에도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면역세포는 어떻게 장에서 뇌로 이동했을까

연구진은 이동 과정에서 CXCR6와 CXCL16이라는 신호체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CXCR6는 면역세포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주소 수신기’이고, CXCL16은 특정 위치에서 나오는 ‘길 안내 신호’처럼 볼 수 있습니다.

이 신호를 따라 장에서 활성화된 CD4+ T세포가 이동해 경막의 정맥동 주변이나 수막의 면역세포 집합체에 자리 잡았습니다.

일부 면역세포는 혈관 밖 뇌 조직에서도 발견됐습니다.

단순히 혈액을 타고 우연히 지나간 것이 아니라 특정 신호에 따라 이동한 면역세포들이 뇌 경계에 정착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한 달 지나도 기억했을까

연구진은 여기서 한 단계 더 확인했습니다.

생쥐에게 처음 장 감염을 일으킨 뒤 5주 이상 지난 시점에 같은 병원체를 혈액으로 다시 노출했습니다.

그러자 경막에 남아 있던 기억 T세포들이 빠르게 증가하고 면역물질을 만들어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첫 감염 후 5개월이 지난 뒤에도 같은 병원체에 대한 기억반응이 확인됐다는 점입니다.

생쥐에게 5개월은 상당히 긴 기간입니다.

연구진이 이를 ‘장기 면역기억’으로 본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뇌가 장염을 기억한다’고 말해도 될까

조금 조심해서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 뇌가

“작년에 장염에 걸렸었지”

라고 기억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연구가 보여준 것은 장 감염을 경험한 면역세포가 뇌 주변으로 이동해 그 병원체에 대한 면역기억을 보존한다는 것입니다.

즉 정확하게 말하면

장 감염의 정보가 면역세포를 통해 뇌의 경계까지 전달되고 저장된다

고 볼 수 있습니다.

Nature 역시 이를 뇌 자체의 기억이라기보다는 뇌 주변 면역체계가 장에서 온 미생물에 대한 기억을 얻는다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 뇌 주변에 이런 면역세포가 필요할까

장은 우리 몸에서 미생물이 가장 많은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평소에는 장벽이 세균이 혈액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습니다.

하지만 심한 감염이나 염증으로 장벽이 손상되면 장내 세균이 혈액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 세균이 혈액을 따라 뇌까지 접근한다면 문제가 커질 수 있습니다.

연구진은 장에서 경험을 쌓은 면역세포가 미리 경막에 자리 잡아 있다가, 같은 병원체가 혈액을 통해 접근하면 빠르게 반응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할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우리 몸이 장에서 만난 병원체 정보를 뇌 주변의 방어체계와 공유하는 셈입니다.

‘장-뇌 연결’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최근 몇 년 사이 장-뇌 축(gut-brain axis)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됐습니다.

장내 미생물과 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연구가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에는 주로

장내 미생물이 만드는 물질, 혈액 속 염증물질, 신경계, 호르몬

등이 장과 뇌를 연결하는 통로로 연구돼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연구는 면역세포 자체가 장에서 뇌 주변으로 이동해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는 또 다른 경로를 보여줍니다.

연구진은 이를 신경세포가 축삭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것과 다른 방식의 정보 전달체계로 보고 있습니다.

신경 대신 이동하는 면역세포, 신경전달물질 대신 사이토카인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장 건강이 기억력이나 우울증과 바로 연결된다는 뜻일까

여기서는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이번 연구는 생쥐를 대상으로 한 동물실험입니다.

“장염을 앓으면 사람의 기억력이 달라진다”

“장내 세균 때문에 우울증이 생긴다”

“장을 치료하면 뇌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

고 결론 내릴 단계가 아닙니다.

다만 수막의 T세포가 만드는 여러 사이토카인이 뇌 기능에 영향을 줄 가능성은 이전 연구에서도 제기돼 왔습니다.

이번 논문 역시 면역세포가 뇌 주변에서 분비하는 사이토카인이 장기적으로 뇌 기능이나 행동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지만, 실제 영향이 무엇인지는 앞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 연구의 핵심은 질병 치료법이 발견됐다는 것이 아니라 장과 뇌가 연결되는 새로운 면역 경로가 확인됐다는 것입니다.

감염뿐 아니라 염증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연구가 감염만 살펴본 것이 아니라 염증성 장질환을 모방한 대장염 모델도 조사했다는 것입니다.

장에 염증이 생겼을 때도 경막의 CD4+ T세포 구성이 달라졌습니다.

이 결과는 장에서 발생한 면역반응이 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다른 기관, 심지어 뇌 주변의 면역환경까지 변화시킬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장 질환과 신경계 질환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당장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아직은 아닙니다.

이번 연구의 상당 부분은 생쥐를 대상으로 진행됐습니다.

사람의 장 감염에서도 똑같은 종류의 면역세포가 똑같은 경로로 이동하고, 수개월 또는 수년 동안 뇌 주변에 머무르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생쥐보다 면역계와 생활환경이 훨씬 복잡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사람의 수막이나 뇌척수액, 혈액 등의 면역세포를 분석해 같은 현상이 존재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또 이런 면역기억이 뇌를 보호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반대로 지나친 면역반응이 염증이나 신경질환에 영향을 줄 가능성은 없는지도 연구가 필요합니다.

좋은 면역기억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면역기억은 대체로 우리를 감염으로부터 보호합니다.

백신도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합니다.

그러나 뇌 주변에서 면역세포가 장기간 활성화돼 있을 경우 상황에 따라서는 지나친 염증반응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논문에서는 수막에 존재하는 면역세포가 만드는 여러 사이토카인이 신경세포와 뇌 기능에 영향을 줄 가능성을 언급합니다.

아직 이번 연구가 특정 뇌질환의 원인을 밝혀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앞으로 연구가 진행되면

감염 → 장 면역반응 → 면역세포 이동 → 수막 면역환경 변화 → 뇌 기능

이라는 새로운 연구축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 이 연구가 중요한가

저는 이번 연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장과 뇌가 생각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보통 장은 소화를 담당하고, 뇌는 생각과 기억을 담당하는 별개의 기관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몸은 그렇게 단순하게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장에서 병원체를 만난 면역세포가 뇌 주변까지 이동하고, 그곳에서 수개월 동안 기다리며 다시 같은 병원체가 나타났을 때 반응합니다.

말 그대로 몸의 한쪽에서 얻은 경험을 다른 기관의 면역체계가 공유하는 셈입니다.

이번 연구가 사람에서도 확인된다면 장 질환, 뇌 감염, 면역질환은 물론 장-뇌 축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다만 현재 단계에서 가장 정확한 표현은 이것입니다.

“장이 아팠던 것을 뇌가 기억한다”기보다, 장 감염을 경험한 면역세포가 뇌의 경계로 이동해 그 병원체를 기억한다.

과학은 때로 제목보다 실제 내용이 더 흥미롭습니다.

이번 연구도 그런 사례인 것 같습니다.

참고자료

Nature — ‘Stomach bugs’ send protective immune cells rushing from gut to brain
장 감염 뒤 면역세포가 장에서 수막으로 이동하고 과거 병원체를 기억한다는 연구를 소개한 Nature 과학뉴스입니다.
Nature 기사 보기

Nature Neuroscience — Intestinal infections establish antigen-specific, long-lived memory CD4+ T cells in the brain and meninges
9월 8일 발표된 원 논문으로, 장에서 활성화된 CD4+ T세포의 이동경로와 장기 면역기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Nature Neuroscience 원 논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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